기계의 눈 · 두 가지 정확함에 대하여 | 올빔칼럼
매체와 인식 시리즈

기계의 눈

두 가지 정확함에 대하여
김호중 2025 읽는 시간 12분
Point Cloud Scan · 거리 풍경의 디지털 흔적

오래된 질문 하나로 시작한다. 사진기는 예술인가 기술인가.

스캐너를 들고 현장에 나가면 거의 매번 같은 질문을 받는다. "이게 사진을 찍는 거예요, 측량을 하는 거예요?" 답이 곤란하다. 둘 다이고, 둘 다 아니다. 그런데 그 곤란함의 진짜 이유는 사진과 측량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정확히 본다는 말로 사실 두 가지 다른 일을 가리키고 있다는 데 있다. 그걸 풀지 않으면 사진기에 대한 답도, 스캐너에 대한 답도 같은 자리에서 헛돈다.

정확히 본다는 게 무엇인가.

한쪽으로는, 우리가 흔히 그렇게 쓰듯이, 이게 무엇인지 또렷하게 보는 일이다. 의자를 의자로, 사람을 사람으로, 경계를 경계로 본다. 분별의 정확함이라 부를 만하다. 측량이 그렇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벽인지를 정해야 길이를 잴 수 있다. 회화도 그렇다. 화가가 무엇을 그릴지 정해야 그릴 수 있다. 사진도 언어도, 우리가 만든 모든 매체가 이 정확함을 향해 일해 왔다. 무엇을 무엇으로 정하는 일.

그런데 다른 한쪽으로 정확히 본다는 말은 전혀 다른 일을 가리키기도 한다. 아직 무엇으로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를 그대로 보는 일. 의자가 아직 의자로 묶이기 전에, 사람이 아직 사람이라 불리기 전에, 경계가 아직 경계로 굳기 전에. 미분별의 정확함이라 부를 만하다.

이 두 정확함은 같은 방향으로 일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일한다.

분별의 정확함은 좁다. 의자라 부르는 순간, 그 사물의 결, 빛, 마디, 사람의 무게를 받아내는 방식, 옆 사물과의 사이. 이름에 들어가지 않는 모든 것이 흐려진다. 하나를 또렷하게 만드는 대가로 나머지를 흘리는 일이다. 미분별의 정확함은 넓다. 부르지 않으니 잃는 것이 없다. 의자로도, 가구로도, 나무 결의 풍경으로도, 빛이 떨어진 한 자리의 분포로도, 무엇이든 떠오를 수 있는 자리에 머문다.

말을 한 번 뒤집으면 이렇다. 정확히 보는 일에는 두 방향이 있는데, 그 둘이 정확히 반대 방향이다. 한쪽은 무엇으로 정해서 또렷해지고, 다른 한쪽은 무엇으로도 정하지 않아서 또렷해진다. 우리는 보통 첫 번째만 정확함이라 부른다. 두 번째는 흐릿함이라 부르거나, 아예 이름조차 없다.

그런데 우리 눈은 두 정확함 가운데 첫 번째밖에 못 한다. 망막의 또렷한 부분은 1.5mm뿐이고, 그 좁은 자리를 우리는 늘 무엇을 찾기 위해 움직인다. 사람을 볼 때 의자가 흐려지고, 의자를 볼 때 옆의 그림자가 흐려진다. 본다는 행위가 곧 무엇으로 부르는 행위다. 우리 눈은 미분별의 정확함을 못 한다. 본다는 일의 기본 사양이 그렇다.

그래서 우리가 만든 모든 매체가 분별의 매체였다. 회화는 화가가 무엇을 무엇으로 정한 결과이고, 사진은 셔터를 누른 사람이 무엇을 프레임에 넣을지 정한 결과이고, 비디오는 누군가가 시간을 어디에서 어디까지로 자를지 정한 결과다. 매체는 생략의 기술이었다. 무엇을 잡으려면 다른 무엇을 흘려야 한다는 점에서 모두 같은 운명에 있었다.

여기서 처음 질문이 한 단계 다른 자리로 옮겨간다. 사진기는 예술인가 기술인가라는 두 답은 서로 다르지만, 같은 종류의 정확함 안에 있다. 작가가 무엇을 무엇으로 정해 보여주든, 기사가 무엇을 무엇으로 정해 재든, 둘 다 분별의 정확함을 한다. 사진기는 그 양쪽 사이를 오갈 뿐, 분별의 안쪽을 떠나지는 않는다. 예술이냐 기술이냐의 갈림은 이 매체의 바깥이 아니라 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스캐너는 그 바깥에 있다.

스캐너가 찍는 것은 점이다. 점은 분별이 아니다. 점은 분별이 일어나기 직전에 멈춰 있다. 좌표일 뿐, 의자도 사람도 벽도 아니다. 의자로 정해지기 전, 사람으로 묶이기 전, 벽으로 굳기 전, 그 자리에 머문다. 분별의 정확함을 포기함으로써 미분별의 정확함을 얻는다. 매체사가 그동안 가까이 가지 못한 자리다.


클라우드라는 이름

이 점들의 모음을 우리는 포인트 클라우드라고 부른다. 이름 하나에 가볍게 지나치기 어려운 데가 있다.

클라우드는 형상 없는 것의 이름이다. 구름은 매 순간 다른 모양이고, 어디까지가 구름이고 어디부터 하늘인지의 경계도 없다. 형상을 가진 것에는 이나 사각형 같은 이름을 붙일 수 있지만, 형상이 없는 것에는 그런 이름이 붙지 않는다. 클라우드는 언어가 잡으려다 손에서 빠져나가는 자리에 붙는 이름이다.

스캔 데이터를 클라우드라 부르는 것은, 그 데이터가 아직 형상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자기 인식이다. 점들은 형상의 재료지만 형상은 아니다. 형상은 그 점들에서 떠올라야 한다. 누가 떠올리는가. 보는 사람이다. 점과 점 사이의 빈 자리를 보는 사람의 눈이 채워야 비로소 형상이 완성된다.

그러니까 미분별의 정확함이 추상적인 진술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점들의 클라우드 앞에 선 보는 사람의 눈에서 매번 일어나는 일을 가리킨다. 다른 모든 매체에서 작가는 분별을 끝내고 보여준다. 그림은 색을 섞어 끝낸 결과이고, 사진은 셔터를 눌러 프레임을 정한 결과이고, 비디오는 시간을 잘라낸 결과다. 분별이 작가의 손에서 끝난다. 보는 사람은 끝난 분별을 받아 본다.

스캐너만 분별의 재료에서 멈춘다. 점을 둔다. 그 사이에서 무엇이 떠오를지를 보는 사람의 눈에 맡긴다. 같은 데이터에서 누구는 건물의 도면을 읽고, 누구는 사라진 동네의 마지막 초상을 읽고, 누구는 좌표의 분포가 만든 추상을 읽는다. 분별은 매번 새로 일어난다. 매번 다르게 일어난다.


점묘, 한 세기 반 전

이 일이 처음은 아니다. 한 세기 반 전, 한 화가가 점으로 그림을 그릴 무렵 비슷한 자리 언저리에 직관으로 도달한 적이 있다. 색을 섞어 칠하는 대신 작은 점을 나란히 찍어 두면, 그 둘을 합쳐 보는 일은 망막이 한다. 점묘는 그림이 색을 만드는 게 아니라 보는 사람의 눈이 색을 만든다는 인식의 전환이었다. 화가가 분별을 멈추면, 보는 사람의 눈이 그것을 끝낸다.

다만 화가는 그 일을 그림 한 장의 크기로 했다. 스캐너는 같은 일을 한 채의 건물, 한 동네, 한 세계의 크기로 한다. 한 화가가 직관으로 도달한 자리에 한 세기 반 뒤 기계가 도달한 셈이다. 스캔 풍경 앞에서 사람들이 거의 같은 반응을 보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쇠라 같다." 직관의 말이지만, 가리키는 자리는 깊다.


매체사의 끝, 매체사의 시작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사진기는 예술인가 기술인가. 스캐너는 측량인가 기록인가.

이제 답이 다른 자리에 가 있다.

사진기는 예술이거나 기술이다. 두 답은 서로 다르지만, 둘 다 분별의 정확함 안에 있다. 스캐너만 다르다. 측량도 기록도 분별의 정확함을 하지만, 스캐너는 미분별의 정확함을 한다. 사진기에 대한 답과 스캐너에 대한 답은 같은 종류의 답이 될 수 없다. 둘이 서로 다른 정확함의 매체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스캐너는 매체사의 이자 시작이다.

끝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분별의 매체가 갈 수 있는 자리가 거기까지이기 때문이다. 매체는 늘 생략으로 작동해 왔다. 무엇을 빼고 무엇을 남길지를 결정하는 일이 매체의 일이었다. 그 결정의 단위가 점점 작아져서, 점에 이르러서는 더 뺄 것이 없는 자리에 닿는다. 매체가 무엇을 빼는 기술이라면, 점은 그 기술의 마지막 자리다.

시작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점에서 모든 형상이 다시 떠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점에는 의미가 없는 대신 모든 의미의 가능성이 있다. 분별을 끝내지 않고 멈춘 자리에서 보는 사람의 눈에 분별을 돌려주는 매체. 그런 매체는 처음이다. 미분별의 매체사가 거기서 시작한다.

이 자리는 갑자기 열린 자리가 아니다. 인간은 늘 거기에 가려 했다.

분별로 사는 우리는 분별 이전에 가닿을 수 없다. 언어로 사는 우리는 언어 이전에 가닿을 수 없다.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어떤 철학자는 그 자리를 물자체라 불렀다. 가닿을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다. 모순적이지만 멈출 수 없는 일이었다.

예술도 같은 그리움의 자리였다. 한 화가가 같은 성당을 시간을 달리해 수십 번 그렸다. 잡히지 않는 빛 그 자체를 잡으려 한 일이다. 점묘도 그 자리에 있었다. 분별을 미루어 둠으로써 분별 이전을 가리키려 한 일이다. 결과물은 모두 분별의 매체 안에 있다. 그러나 그 매체로 분별 바깥을 향한 손짓을 만들었다. 도달이 아니라 도달의 표시였다.

스캐너는 표시가 아니다. 점은 가리키지 않는다. 점은 거기에 있다. 분별 이전에 머문다. 손짓이 아니라 자리 자체다.

인간이 평생 가닿고 싶어 한 자리에, 인간이 만든 도구가 처음으로 다녀왔다. 우리가 갈 수 없는 자리에 우리 도구가 다녀와서, 흔적을 들고 돌아온다. 그 흔적이 점이다.

미디어 아티스트들이 너도나도 스캐너를 든다. 갤러리에 가면 점으로만 이루어진 풍경이 떠 있다. 자율주행 자동차가 라이다로 세계를 본다. 휴머노이드의 머리에 뎁스 카메라가 달린다. 모두 같은 자리로 모여든다. 분별을 조금 미루어 두는 자리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작가는 자기 시선의 편향에서 한 발 떨어지기 위해, 자율주행은 잘못된 분별이 만드는 사고를 피하기 위해, 휴머노이드는 본 적 없는 환경에서 움직이기 위해. 모두 분별 이전에 머무는 자리에서 시작해야 한다. 미분별의 정확함이 처음으로 자기 자리를 얻고 있다.

말하자면 이렇다. 우리는 정확히 보지 않으려는 방향으로 정확히 보려 하고 있다. 모순처럼 들리지만 모순이 아니다. 정확함이 두 종류라는 사실을 잊었을 때만 모순이다. 그 잊혀 있던 두 번째 정확함이 매체사의 끝에서 처음 자기 이름을 얻고 있다.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그 정확함을 우리 손이 아니라 기계의 눈이 처음 해냈기 때문이다.


스캐너를 들고 현장에 나간다. 1초에 100만 개의 점이 찍힌다. 점은 분별이 아니다. 점은 분별이 일어나기 직전에 멈춰 있다. 한 채의 건물이 아직 건물로 묶이기 전, 한 동네가 아직 동네라 불리기 전, 그 자리에 머무는 데이터가 만들어진다. 우리 눈은 그 자리에 갈 수 없다. 기계의 눈이 거기에 다녀온다. 그리고 우리 앞에 점을 둔다. 그 점에서 무엇이 떠오를지를 우리에게 돌려준다.

신기한 일이다.

김호중 · Hojoong Kim
AllBIM Technologies 대표. 2009년부터 Scan to BIM 기반 건축 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BIM 기반 건축 협업 디자인』 저자.
다음 글
미래를 그리는 공간기록
스캔, 시간을 조작하는 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