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마을 골목에서 Faro TX-5 레이저 스캐너로 현장 스캔 진행 중. 불암산 자락이 배경에 보인다.백사마을
기록화 프로젝트
사라지기 전에 기록한다는 것의 의미
백사마을은 1967년 서울의 도시 팽창 과정에서 용산, 청계천, 안암동 등의 개발로 밀려난 철거민들이 불암산 자락에 터를 잡으며 형성된 강제이주 정착지다. 수십 년의 세월이 쌓이며 골목과 집들이 자연스럽게 얽혀 들어갔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살았다.
2009년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된 이후 오랜 논의 끝에 2020년 착공이 시작됐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 불리던 이 마을이 사라지기 전, 올빔은 서울주택도시공사의 의뢰로 마을 전체를 3D 스캔과 VR로 기록하는 작업을 맡았다.
이 프로젝트는 기록이 기술의 영역을 넘어 윤리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재개발이 아무리 많이 이루어져도, 이 데이터 안에서 백사마을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을을 어떻게 나누고 기록할 것인가
186,965㎡에 달하는 마을 전체를 무작정 스캔할 수는 없다. 골목마다 지형이 다르고, 건물 밀도가 다르고, 접근 방식이 달라야 한다. 올빔은 마을을 A~E 5개 구역으로 구획하고, 각 구역의 특성에 맞는 스캔 전략과 해상도를 별도로 수립했다.
담당 건축가도 구역별로 배정됐다. 민현식, 손진, 김광수, 정현아, 임재용, 우의정, 이민아, 신승수 등 10팀의 건축가가 각 구역을 담당했고, 올빔은 전체 구역에 걸친 3D 스캔 아카이브를 일관된 정밀도로 완성해야 했다.
Faro TX-5 + Matterport — 두 기술의 결합
이 프로젝트에서 올빔은 목적이 다른 두 가지 기술을 병행했다.
두 기술의 역할은 다르다. Faro는 사실을 기록하고, Matterport는 경험을 기록한다. 백사마을의 완전한 디지털 아카이브는 이 둘이 결합됐을 때 완성된다.
Autodesk ReCap Pro에서 확인한 A구역 3D 스캔 데이터.Field Challenge
야외 VR기록의 가장 큰 적은 태양이었다
실내 기록과 달리 야외 스캔에는 조도 문제가 있다. Matterport는 적외선 레이저 기반이라, 한낮의 강한 태양광이 그대로 쏟아지면 레이저 신호가 간섭을 받는다. 오류 데이터가 발생하거나 측정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구간이 생긴다.
해결책은 시간이었다. 올빔은 이른 아침과 해질녘 빛 조건이 안정된 시간대에 집중적으로 현장에 투입됐다. 같은 구역을 여러 번 방문하며 촬영 가능한 시간에 최대한의 데이터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7개월에 걸쳐 마을 전체를 채워나갔다.
좁은 골목, 경사진 지형, 무작위로 연결된 건물들 사이에서 스캐너가 닿을 수 있는 모든 포지션을 찾아가며 한 칸씩 데이터를 쌓았다. 결과적으로 수백 개의 스캔 파일이 정합되어 마을 전체의 연속적인 포인트클라우드가 완성됐다.

비타민 목욕탕, 연탄은행, 그 집
Matterport로는 마을의 대표 공간들을 개별적으로 기록했다. 비타민 목욕탕, 연탄은행, 중계교회, 그리고 이름 없는 골목집들. 각 공간의 내부를 360° VR로 담아, QR코드 하나로 누구나 그 공간에 들어갈 수 있게 했다.
마을이 철거된 뒤에도 이 데이터 안에서는 목욕탕 탈의실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다. 연탄은행의 좁은 복도를 걸을 수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기록의 의미는 커진다.
포인트클라우드는 미래를 위한 원시 데이터다
3D 스캔 데이터의 가장 큰 특성은 사용처가 지금 당장 결정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측량된 점들의 집합인 포인트클라우드는 BIM 소프트웨어에서 단면도와 평면도를 즉시 생성할 수 있고, 3D 프린팅 모형으로 출력할 수 있고, VR 체험 콘텐츠로 만들 수 있고, 학술 연구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남대문이 불탔을 때, 노트르담 대성당이 불탔을 때 3D 스캔 데이터로 원형 복원이 가능했던 것처럼, 백사마을의 데이터는 지금은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미래에 쓰일 수 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같은 원시 데이터에서 더 많은 것을 추출할 수 있게 된다.
프로젝트 영상
기록은 남는다
백사마을은 이제 없다. 골목도, 목욕탕도, 연탄은행도 철거됐다. 하지만 이 데이터 안에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재개발이 많아질수록, 이런 기록의 필요성도 커진다. 개발 이전의 공간을 기록해두는 것, 그리고 그 데이터를 미래 세대에게 남겨두는 것. 어쩌면 그게 기술이 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일인지도 모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