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복제 가능 시대의 건축 작품 · 아우라의 내막 | 올빔칼럼
매체와 인식 시리즈

공간 복제 가능 시대의 건축 작품

아우라의 내막
김호중 2025 읽는 시간 14분
Last Original · 복제 가능 시대, 마지막 원본의 시험대

판테온은 아직 한 자리에만 있다. 2천 년째다. 옥룡창에서 쏟아지는 원형 빛이 하루 동안 바닥을 가로질러 이동한다. 들어가지 않으면 모른다. 사진으로 보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림은 이미 다르다. 게르니카는 마드리드에 있지만, 화면을 확대하면 원본 앞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거리로 들어갈 수 있다. 베냐민이 1935년에 예고한 일이 일어났다. 복제 기술이 예술 작품의 아우라를 무너뜨렸다. 진본성과 일회성에서 오던 아우라는 무한 복제 앞에 붕괴했고, 소수의 것이던 예술이 모두의 앞에 놓였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공간은 복제된 적이 없다.

그림은 복제됐다. 음악은 복제됐다. 연극의 일회성은 영화로 복제됐고, 영화는 스트리밍으로 무한 복제됐다. 인류가 만들어온 예술의 거의 전부가 복제의 자리를 통과했다. 그런데 공간만은 그러지 않았다. 루이스 칸의 사크 연구소는 캘리포니아에 한 채뿐이고, 터렐의 방은 그 건물 안에만 있다. 시에나의 캄포 광장은 그 도시에만 있고, 바라간의 물의 집은 멕시코시티에만 있다. 공간은 인류가 아직 복제한 적 없는 마지막 원본이다.

왜일까. 공간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어서일까. 복제를 거부하는 어떤 본질이 있어서일까.


수단이 없었을 뿐이다

아니다. 수단이 없었을 뿐이다.

인류는 단 한 번도 3차원 매체를 가진 적이 없다. 동굴 벽화도 평면이다. 양피지도 평면이다. 사진도 영화도 평면 위의 기록이다. 조각이 있었고 건축 모형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복제와 전달이 불가능했다. 조각은 한 자리에 고정된 한 점이었고, 모형은 한 채의 건물에 한 채뿐이었다. 3차원 물체는 사본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매체의 역사는 평면을 주류로 택했다.

건축가들은 그 한계를 가장 날카롭게 느낀 사람들이었다. 3차원 공간을 설계하고 짓는 일을 하면서 손에 쥔 매체가 평면뿐이었다. 해결책은 자르는 일이었다. 공간을 수평으로 잘라 위에서 내려다보면 평면도가 된다. 수직으로 잘라 옆에서 보면 단면도가 된다. 그 자르기는 천재적이었다. 한 장의 도면으로 멀리 떨어진 손들이 같은 건물을 지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 천재적인 자르기는 공간을 납작하게 눌러서 종이에 욱여넣는 일이기도 했다. 공간이 공간인 채로 복제된 것이 아니었다.

공간이 복제되지 않은 것은 공간이 복제를 허용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공간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인류가 가지지 못해서였다. 그 공간들이 수십, 수백, 수천 년 동안 각자의 자리에만 있었던 것은, 그것이 마땅히 그래야 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옮길 방법을 우리가 갖지 못해서였다.


문이 처음 열리다

지금 그 그릇이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3D 스캐너는 공간의 형상을 자르지 않고 디지털 안으로 가져온다. 카메라가 한 방향을 찍는 동안 스캐너는 공간 전체를 측정한다. 빛이 닿지 않는 구석까지, 두 벽이 만나는 모서리까지, 돌아서면 보이는 뒤편까지. 그 데이터 위에 가상의 공간이 서고, 사람이 헤드마운트 디바이스를 끼고 들어선다.

처음 경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같은 반응을 한다. 잠시 말이 없어진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분간을 못 한다. 뇌가 공간을 인식하는 방식에 무언가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다. 짓기 전에 미리 걸어볼 수 있고, 사라진 공간을 다시 걸어볼 수 있다. 공간이 처음으로 장소를 떠날 수 있게 됐다.

공간 복제 가능 시대가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우리가 처음으로 와 있다. 하지만 이것이 아우라인가는 다른 질문이다.


시험대에 오른 아우라

우리가 공간에서 느껴온 아우라는 어디서 온 것이었는가.

터렐의 방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의 낯섦, 루이스 칸의 안뜰에 내려앉는 정적, 좁은 계단을 올라 광장이 갑자기 열리는 순간의 그 숨. 이것이 공간 자체의 힘이었는가. 아니면 공간이 복제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복제 불가능성이 만든 희소성이 아우라처럼 느껴진 것이었는가.

이 두 가지는 경험에서 구분되지 않는다. 그림의 아우라가 어디서 오는지, 복제가 시작되기 전까지 물을 필요가 없었다. 복제가 시작된 후에야 그 질문이 생겼고, 베냐민은 그 답이 진본성과 일회성에 있었다고 정리했다. 공간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 복제 수단이 없었으니 비교 대상도 없었고, 공간의 아우라가 어디서 오는지를 시험할 방법이 없었다.

수단이 생긴 지금, 처음으로 그 시험이 가능해졌다.

복제된 공간 안에 들어섰을 때, 그 정적이 옮겨지는가. 복제된 좁은 계단에서 같은 기대가 차오르는가. 이 시험의 답은 둘 중 하나다.

하나. 공간의 아우라는 형상에 있다. 빛이 그 비율로 그 각도에서 내려오는 것, 두 면이 그 비율로 그 자리에서 만나는 것. 그것이 복제되면 아우라도 함께 복제된다. 이미지 복제가 예술의 민주화를 만들었던 것처럼, 공간 복제는 공간 예술의 민주화를 만든다.

둘. 공간의 아우라는 그곳에 실제로 있음에서 온다. 그날 그 시간 그 도시의 빛, 수백 년이 밟고 지나간 돌바닥의 질감, 그 온도의 공기. 형상은 복제되지만 그것들은 복제되지 않는다. 복제된 공간은 공간의 그림자일 뿐이다.

어느 쪽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어떤 공간의 아우라는 형상에 있고, 어떤 공간의 아우라는 그곳에 있음에 있을 것이다. 공간마다 비율이 다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점이다. 공간 복제 기술은 공간의 아우라를 파괴하거나 보존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으로 그 아우라가 어디서 오는지를 시험대에 올린다. 수천 년 동안 한 번도 묻지 못했던 질문을, 이제 비로소 실제로 물어볼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쪽에 서 있는가.

공간의 아우라는 형상에만 있지 않다고 본다. 그 이유는 이렇다. 우리가 아우라를 경험할 때, 거기 가는 행위 자체가 이미 경험의 일부다. 기대, 이동, 도착. 그 공간이 세계 안에서 단 하나의 자리를 점유한다는 사실이 경험의 틀을 만든다. 가야만 만날 수 있다는 조건이, 공간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그 공간을 다르게 만든다.

복제된 공간은 형상을 가져오지만 그 조건은 가져오지 못한다. 그러니 아우라는 부분적으로 옮겨지고, 부분적으로 남는다. 복제된 터렐의 방에서 올려다본 하늘이 실제 방에서 올려다본 하늘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다르지도 않을 것이다. 형상이 아우라의 일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공간의 아우라가 수단의 부재 덕에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우리는 처음으로 그 아우라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됐다. 그 나눔이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지는, 복제된 공간 앞에 처음으로 서게 될 사람들만이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이 쌓이면서, 수천 년 동안 물어볼 수 없었던 그 질문에 처음으로 답이 생긴다.

김호중 · Hojoong Kim
AllBIM Technologies 대표. 2009년부터 Scan to BIM 기반 건축 역설계 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건축가이자 공간기록 전문가.
원출처 강연
공간 복제 가능 시대의 건축 작품
학고재 디지털 아트 심포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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