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ter & Data — 기술 칼럼
현황 조사는 설계사의 몫인가
리모델링 설계의 비용 구조와 설계사가 먼저 요청해야 할 것
김호중
2026.6
읽는 시간 5분
Existing Condition Survey vs 3D Scan Data · 현황 도면과 스캔 데이터 비교
리모델링 프로젝트에서 현황 조사는 설계사가 한다. 이것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왜 설계사의 몫인지 물으면 대답이 명확하지 않다. 계약서에 그렇게 적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굳어진 것이다. 이 관행이 설계사에게 어떤 비용을 만들고,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려 한다.
계약이 설정한 책임의 경계
미국건축가협회(AIA)의 표준 계약 양식(B101, C401)은 기존 건물의 물리적 현황 조사 책임을 설계자가 아닌 건축주가 외부 전문 기관을 고용하여 수행해야 하는 영역으로 명시한다. 설계자가 통제할 수 없는 현장 조건의 오류로부터 설계팀을 보호하기 위한 조항이다. 영국왕립측량사협회(RICS)도 리모델링 설계 착수 전 엄격한 정밀도 기준에 따른 현황 데이터 확보를 권고하며, 조사 발주의 책임을 건물주에게 귀속한다.
한국의 현실에서 이 원칙은 잘 적용되지 않는다. 수주 경쟁이 있고 설계비는 제한적이고 건물주는 "다 포함된 거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설계사는 조용히 흡수한다.
그 흡수의 비용은 착공 후에 청구된다. Navigant Consulting의 데이터에 따르면, 현장 불일치로 발행되는 RFI(설계 변경 요청) 1건을 설계사무소가 처리하는 데 드는 실질 행정 비용은 건당 $1,000~$3,000, 소요 기간은 10~14일이다. 스캔 기반 사전 조율을 적용한 현장에서 RFI가 30~68% 감소하고 설계 변경 요청서(Change Order)가 37~48% 줄어든다는 분석이 있다. 이 수치들은 현황 데이터의 정밀도가 설계사무소의 재정적 결과에 직접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진이 설계 자유도를 제약하는 방식
설계사가 불확실한 현황 위에서 작업할 때 그 불확실성을 흡수하는 방법은 안전 마진이다. 기둥 위치가 정확히 확인되지 않으면 주변에 여유를 두고, 천장 내부 배관 경로가 불분명하면 마감 높이를 낮게 잡는다. 개별 판단은 합리적이다. 그 마진들의 합산이 결과물의 품질 한계를 설정한다.
수작업 실측의 오차는 ±10~50mm 수준이다. 3D 스캔은 ±2mm. 이 차이가 설계에서 무엇을 열고 닫는지는 USIBD(미국건축문서화협회)의 정밀도 등급(LOA) 프레임워크로 명확히 구분된다.
| 정밀도 등급 |
오차 범위 |
측정 방식 |
가능 작업 범위 |
| LOA 30 |
±5–15mm |
수작업 실측 |
일반 리모델링 설계 개발, 가구 배치 검토 |
| LOA 40 |
±1–5mm |
3D 레이저 스캔 |
정밀 밀워크 가구, MEP 공장 선제작 가능 |
USIBD Level of Accuracy (LOA) 프레임워크 — 정밀도 등급별 가능 작업 범위
이 차이가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곳이 있다. LVMH, Tiffany 등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 본사의 설계팀은 현지 협력사가 착수하기 전에 3D 스캔 기반 현황 BIM을 계약상 필수 납품물로 요구한다. 매장 가구의 상당 부분이 본사 공장에서 밀리미터 단위로 커스텀 제작되어 반입되기 때문이다. ±25mm 수준의 현황 오차 위에서 이 가구들은 맞지 않는다. Gensler를 비롯한 글로벌 설계 대기업들도 로컬 협력 파트너에게 동일한 기준을 요구한다. 고부가가치 프로젝트의 참여 자격이 데이터 정밀도에서 시작된다.
건물주에게 가져가야 할 논리
현황 데이터의 발주 책임이 건물주에게 있다는 계약 원칙은 이미 있다. 설계사에게 남은 것은 이 원칙을 계약 협의 단계에서 복원하는 것이다.
설득의 논거는 설계사의 편의가 아니라 건물주의 이익이어야 한다. 건물주가 정밀 현황 데이터 없이 리모델링을 진행할 때 잃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설계 마진이 쌓이면서 유효 임대 면적이 줄어든다. 서울 핵심 권역 오피스 기준, 전용률 1% 하락은 연간 임대 수입 수천만 원, 투자 환원율 5% 적용 시 자산 가치 10억 원 이상의 영구적 감소로 이어진다. 매각 시 정밀 현황 도서가 없으면 인수 실사팀은 불확실성을 자산 할인으로 반영한다. 건물 운영 30년에 걸쳐 데이터 부재는 시설 유지관리 비용의 만성적 누수로 이어진다.
$1K–3K
RFI 1건 처리
실질 행정 비용
Navigant Consulting
30–68%
스캔 도입 시
RFI 감소율
스캔-BIM 사전 조율 적용
37–48%
Change Order
감소율
스캔-BIM 사전 조율 적용
본 시리즈의 다음 편 「측정되지 않은 공간의 가격」은 이 수치들을 건물주의 언어로 구성한 자료다. 클라이언트 미팅 전 공유하는 것이 대화의 출발점을 바꾸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다.
기준을 바꾸는 것도 설계사가 먼저 할 수 있다
설계사가 이 대화를 먼저 시작하면 세 가지가 달라진다. 설계의 전제가 검증된다. 현장 불일치로 발생하는 무상 재작업의 빈도가 줄어든다. 그리고 결과물의 품질이 달라진다.
현황 조사를 설계비 안에 흡수하는 관행은 계약 원칙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한 번 굳어진 것이 기준이 됐을 뿐이다. 이 기준을 바꾸는 것도, 설계사가 먼저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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