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이라는 말은 보통 옛것을 남기는 일을 가리킨다. 그런데 어떤 기록은 그 일을 하지 않는다. 미래를 그리는 공간기록. 한 번에 들어맞지 않는 말이다.
이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보려면, 매체가 그동안 무엇이었는지부터 되짚어야 한다. 우리는 3차원에 산다. 그런데 우리가 옮겨 적기 위해 만든 매체의 거의 전부가 평면이었다. 종이, 사진, 글, 그림. 영화도 평면 위의 시간 변화일 뿐이다.
물론 평면만이 매체였던 것은 아니다. 조각이 있었고, 건축 모형이 있었고, 부장품과 토우가 있었다. 인류는 3차원 매체도 만들어 왔다. 그러나 3차원 매체는 매체사의 주류가 되지 못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매체가 매체로 작동하려면 옮겨질 수 있어야 한다. 멀리 떨어진 손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같은 내용을 전해야 한다. 평면은 그 일을 잘 했다. 사본이 무한히 가능했고, 사본 사이에 내용 손실이 거의 없었다. 3차원 매체는 그러지 못했다. 조각은 한 자리에 놓인 한 점이었고, 모형은 한 채의 건물에 한 채뿐이었다. 옮기려면 매번 새로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매체사는 평면을 주류로 택했다. 한 차원 부족한 매체에 한 차원 더 많은 세계를 옮기려면, 잘라야 했다. 매체사는 결국 어떻게 잘 자를 것인가의 역사였다.
도면이라는 위대한 자르기
이 자르기의 가장 위대한 자리에 도면이 있다.
도면은 한 번 보면 단순하지만, 다시 보면 거대한 발명이다. 평면 한 장에 건물 한 채가 들어간다. 그 평면 한 장으로 멀리 떨어진 손들이 같은 건물을 짓는다. 도면이 없었으면 인류가 같은 건물을 멀리 떨어진 손들로 함께 짓는 일은 이만큼 일어나지 못했다. 한 장의 종이가 우리가 지금 사는 도시의 많은 자리를 일으켰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협업 도구 중 하나가 거기 있다.
그런데 도면이 어떻게 그 일을 해냈는지를 묻기 시작하면, 한 가지 사실이 드러난다.
평면도가 무엇인가. 일정한 높이에서 건물을 칼로 수평으로 잘라, 위에서 내려다본 그림이다. 단면도가 무엇인가. 같은 일을 수직으로 잘라, 옆에서 본 그림이다. 입면도, 배치도, 상세 도면. 모두 어떤 면에서 자른 결과를 옮겨 적은 것이다. 도면이라는 매체의 작동 원리는 자르기다.
이 자르기는 천재적이지만 폭력적이다.
도면 안에 들어간 것은 잘려진 면뿐이다. 그 면 너머에 있던 것은 도면 바깥에 남는다. 빛이 그 자리에 어떻게 떨어지는지, 두 면이 모서리에서 어떻게 만나는지, 사람이 그 공간을 지나갈 때 무엇이 보이는지. 다 잘려 나간다. 도면 안에는 자르고 남은 흔적만 있다. 잘려 나간 모든 것은 도면을 읽는 사람이 머릿속에서 다시 채워야 한다. 채워지지 않으면 짓지 못한다.
매체가 모자라는 자리를 보는 사람의 머리가 채운다. 매체사의 오랜 분업이다.
CAD가 등장했을 때 한 가지 기대가 있었다. 컴퓨터는 무한한 가상공간이니, 종이의 한계가 사라진다는 기대였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한 일은 종이 시절의 습관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무한한 3차원 공간 안에서, 우리는 여전히 라인을 그렸다. 평면에 라인을 그리고, 그 평면을 다른 평면에 옮겨 그렸다. 매체의 그릇이 바뀌었지만, 매체의 문법은 종이 시절을 떠나지 못했다.
자르기의 문법은, 평면 매체의 자리에서 일하는 한 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객체로 인식하는 세계
여기서 한 가지 짚어야 할 자리가 있다. 우리가 건축적인 자리에서 세계를 가리킬 때, 가리키는 단위는 라인이 아니다.
지금 손에 쥔 것이 무엇인가 묻는다고 하자. 사람은 마이크라고 답한다. 검은 원통이라 답하지 않는다. 앞에 놓인 것이 무엇인가 물으면 의자라고 답한다. 나무로 된 직선의 모음이라 답하지 않는다. 우리가 언어로 가닿는 자리에서는, 무엇이 무엇이라는 이름이 먼저 있고, 그 이름에 형상과 정보가 따라붙는다.
이름이 없으면 정보가 못 붙는다. 검은 원통에 누가 만들었는지를 묻기 어렵지만, 마이크에는 누가 만들었는지를 물을 수 있다. 어떤 회로인지, 어디에 연결되는지, 어떤 주파수를 잡는지. 객체가 되어야 정보가 모인다. 객체가 되어야 다른 객체와 관계를 맺는다. 적어도 우리가 언어로 가리키고, 정보로 묶고, 짓는 자리에서는 그렇다.
그런데 우리가 손으로 만들어 온 매체는 이 객체 단위를 매체에 옮기지 못했다. 도면도 사진도 글도, 객체를 다루는 매체가 아니라 형상의 면을 다루는 매체였다. 면을 보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그 면이 다시 객체로 묶여야 했다. 객체는 매체 안에 없었다. 매체 바깥에, 보는 사람의 인식 안에 있었다.
처음으로 매체 안에 객체 자체가 들어온 자리가 BIM이다.
여기서 한 가지 자리를 정확히 짚어 두어야 한다. 가상 안에서 면이 아닌 입체를 다루는 일은 BIM 이전부터 있었다. 솔리드 모델링이 있었고, 자유 곡면을 다루는 도구가 있었다. 그러니까 객체라는 말이 가상에 들어온 것은 BIM이 처음이 아니다. BIM이 처음으로 한 일은 그것과 다른 자리에 있다. 건축의 의미론이 객체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BIM에서 벽을 그리려면 벽 명령을 쓴다. 라인 명령도, 박스 명령도 아니다. 문을 그리려면 문 명령을 쓴다. 그 문은 허공에 떠 있을 수 없다. 가상세계 안에서도, 문은 벽에만 붙는다. 우리가 실세계에서 문이 벽에만 붙는다고 인식하는 그대로, 매체 안에서도 그렇다. 객체에 벽이라는 이름, 문이라는 이름, 벽과 문 사이의 관계가 박혀 들어왔다. 매체가 건축이라는 도메인을 안다는 자리에 처음 들어선 것이다.
이 차이가 작아 보일 수 있다. 라인을 쓰든 객체를 쓰든, 결국 같은 건물을 그리는 일이 아닌가. 그렇게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벽 객체는 그저 두 라인이 아니다. 두께를 가진다. 재료를 가진다. 어떤 층의 어떤 자리에 있는지를 안다. 옆 객체와 어떻게 만나는지를 안다. 무게가 얼마인지, 단열 등급이 얼만지,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어디서 사 왔는지, 언제 노후할 것인지. 객체 하나에 정보가 끝없이 붙는다. 라인은 그저 그어진 자국이지만, 객체는 세계 안에 한 자리를 차지한 어떤 것이다. 두 자리 사이에 큰 간격이 있다.
매체가 형상을 자르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라인의 매체에서는 형상의 자르기가 불가피했다. 두 라인 사이의 모든 형상은 보는 사람이 알아서 채워야 했다. 객체의 매체에서는 채울 일이 줄어든다. 매체가 형상을 그대로 가져온다.
이게 BIM이라는 매체가 매체사에 가져온 일이다. 형상을 자르는 문법에서, 형상을 그대로 가져오는 문법으로.
가상과 실상의 위빙
객체 매체가 가능해지면, 한 가지 새로운 일이 따라온다. 가상에 그대로의 건물이 미리 서 있을 수 있다는 일이다. 여기서의 그대로는 형상의 그대로다. 빛, 소리, 사람의 손때, 그 공간이 주는 정동까지 가상이 가져왔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들은 여전히 가상 바깥에 있다. 다만 매체가 형상에 한해서는 잘라 옮길 필요가 없어졌다.
도면 시절에는 가상이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았다. 도면은 가상이 아니라 기호의 모음이었다. 그 기호를 보고 머릿속에서 가상을 만드는 일은 사람의 일이었다. 매체 안에는 기호만 있었고, 가상은 사람의 머리 안에 있었다.
BIM은 다르다. BIM 안에 들어가면, 거기에 건물이 서 있다. 사람의 머리에서 기호를 풀어 건물을 만들 일이 없다. 매체 안에 건물이 미리 서 있다. 짓기 전에, 가상에서 그 건물이 다 서 있다. 거기서 사람이 걸어 본다. 모서리에 부딪쳐 본다. 두 부재가 만나는 자리를 들여다본다. 건물이 미래로부터 미리 와 있다.
이게 BIM이 매체사에 가져온 첫 번째 일이다. 가상에서 실상으로 가는 길을 형상을 자르지 않고 열었다.
스캔은 그 반대 길을 열었다. 실상에서 가상으로, 형상을 자르지 않고 가는 길.
스캐너가 한 자리를 찍으면, 그 자리의 형상이 객체로 가상에 들어온다. 어떤 면도 잘리지 않는다. 카메라가 향한 한 면이 아니라 그 자리 전체의 형상이 들어온다. 빛이 안 닿는 구석에도 점이 가 닿는다. 우리가 매체사 내내 바깥에 두고 머리로 채워야 했던 형상의 자리들이, 처음으로 매체 안에 들어왔다.
물론 이 그대로는 한정된 그대로다. 스캐너는 형상은 자르지 않지만, 다른 자리들은 잘라낸다. 한 순간의 형상만 잡힌다. 그 자리의 빛은 한 시점의 빛이고, 그 자리의 소리, 냄새, 거기 있는 사람들의 표정과 말은 데이터 바깥에 있다. 어떤 매체도 다 가져오지는 못한다. 다만 매체사 내내 잘리던 것들 가운데 형상이라는 한 차원이 처음으로 안 잘리는 자리에 와 있다는 것뿐이다.
이 두 길이 만나면 새로운 일이 또 일어난다. 가상과 실상이 왕복하기 시작한다.
매체사 내내 가상과 실상은 한 방향이었다. 도면은 가상에서 실상으로 한 번 가면 끝이었다. 사진은 실상에서 가상으로 한 번 오면 끝이었다. 둘이 만나서 주고받는 일은 없었다. 가상과 실상은 두 자리에 머물렀다. 한 번 건너갔다가 돌아오는 길이 없었다.
이제 오간다. BIM 모델이 실상으로 나가서 건물의 한 자리가 된다. 그 자리가 다시 스캔으로 가상에 돌아온다. 가상이 갱신된다. 다음 결정이 거기서 시작한다. 다시 실상으로. 다시 가상으로. 한 번씩, 한 번씩.
천을 짤 때 날실과 씨실이 한 번씩 교차하면서 천 자체를 만들어 가듯이, 가상과 실상이 한 번씩 교차하면서 건물 자체를 만들어 간다. 강연 자리에서 누가 이 일에 위빙이라는 이름을 붙인 적이 있다. 좋은 이름이다. 교차의 결과물이 천 그 자체라는 점에서 정확하다. 건물은 도면이 만든 결과가 아니라, 가상과 실상이 오가는 그 왕복 자체다. 왕복 바깥에 건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이 왕복은 건물이 다 지어졌다고 끝나지 않는다. 다 지어진 건물도 시간 안에서 변한다. 콘크리트가 미세하게 가라앉는다. 외피가 바람에 휜다. 설비가 노후한다.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간다. 그 변화를 다시 스캔이 잡는다. 가상이 갱신된다. 결정이 갱신된다. 실상이 갱신된다. 왕복은 건물이 사라지는 날까지 이어진다.
디지털 트윈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자리가 여기다. 박제된 복제물이 아니다. 시간 안에서 함께 변해 가는, 살아 있는 동기화 모델이다. 가상에 한 번 만들어 두고 끝나는 게 아니라, 매 단계 실상의 변화가 가상에 다시 들어오면서, 가상 자체가 살아간다. 한 채의 건물이 자기 평생의 변화를 가상 안에 누적해 간다.
영정의 자리
왕복하는 매체가 닿는 자리는 미래만이 아니다. 사라지는 것 앞에서도 다르게 작동한다.
매체사가 사라지는 것 앞에서 가장 무거운 자리는 영정 사진이다. 한 사람의 한 표정을 흐르지 않는 곳에 묶어, 사라진 다음에도 그 표정을 만질 수 있게 한다. 사진이 어쩌다 가장 잘하는 일이 아니라, 사진이 가장 잘하라고 만들어진 일에 가깝다.
영정 사진을 잡고 싶을 때 우리가 진짜 잡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한번 짚어 보면, 그 사람의 한 표정만은 아니다. 그 사람이 방을 가로지르던 걸음, 의자에 앉을 때의 자세, 손이 책을 잡던 각도, 빛이 그 사람의 어깨에 떨어지던 자리. 표정 하나는 그 모든 것의 대표였을 뿐이다. 다른 자리들이 사라진 다음에 한 표정이 남아서, 그 사람을 한 표정으로 기억하는 일에 도움을 주었을 뿐이다.
영정 사진이 한 면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매체가 거기까지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잡고 싶었던 것이 한 면이었던 게 아니다. 잡을 수 있는 자리가 한 면뿐이었을 뿐이다. 매체가 한 면을 자르고 그 한 면만을 우리에게 돌려줬다.
스캐너를 그 비슷한 자리에 들고 들어가는 일이 있다. 헐릴 동네의 골목, 사라질 건물의 마지막 모습. 사진이 한 면을 묶어 두는 자리에서, 스캐너는 그 자리의 형상 전체를 묶어 둔다. 카메라가 향한 한 면이 아니라, 보는 사람이 나중에 그 데이터 안을 돌아다닐 수 있는 자리. 사라진 다음에 그 골목을 다시 한 번 걸어 볼 수 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를 정직하게 짚어야 한다. 보존되는 것은 그 자리의 형상이지, 그 자리 자체가 아니다. 골목의 냄새, 거기 살던 사람들의 말소리, 시간대마다 다른 빛, 그곳이 한 사람의 삶에 가졌던 무게. 다 데이터 바깥에 있다. 사진이 한 면을 잘라 가져왔다면, 스캐너는 형상이라는 한 차원을 그대로 가져왔다. 매체가 깊어진 만큼 가져온 것도 깊어졌지만, 그 깊이가 그 자리 전체까지는 아니다.
그래도 이 깊이의 차이는 작지 않다. 영정이 사라진 사람을 기억하게 한다면, 이 자리는 사라진 자리를 돌아다니게 한다. 한 면에 묶인 회상이 아니라, 형상 안을 다시 움직이는 회상. 두 일이 같은 그리움에서 출발하지만, 도구의 깊이가 다르다.
매체가 형상을 자르지 않게 되면서, 영정의 자리가 한 면에서 그 자리의 형상 전체로 옮겨간다. 우리가 가닿고 싶었지만 매체가 못 데려가 주던 형상의 자리에, 처음으로 매체가 따라간다. 다만 그 결정을 누가 하는가, 어느 자리는 스캔되고 어느 자리는 스캔되지 않는가는, 다른 글이 짚을 자리다.
미래를 그린다는 말
이제 첫 자리로 돌아간다. 미래를 그리는 공간기록이라는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다시 본다.
기록이라는 말이 그동안 가리켜 온 자리는 과거를 미래로 보내는 일이었다. 사진이 그 일을 했다. 글이 그 일을 했다. 도면도 그 일을 했다. 시간의 한 점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그 점이 지나간 다음에도 알 수 있도록 묶어 두는 일.
매체가 형상을 자르지 않게 되고, 가상과 실상이 오가기 시작하면서, 기록이라는 말의 자리가 옮겨졌다.
지금을 형상 그대로 가상에 옮겨 두는 일도 기록이다. 그 가상에 미래의 일을 미리 그려 보는 일도 기록이다. 가상의 결정이 실상이 되고 실상이 다시 가상이 되는, 그 왕복 자체도 기록이다. 시간의 한 점을 묶어 두는 일에서, 시간 안에서 흐름과 함께 오가는 일로 옮겨 갔다. 기록이 흐름의 한 줄이 되었다.
기록이 미래를 그린다는 말이 그 안에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어 둘 자리가 있다. 매체가 형상을 자르지 않게 되고 가상이 실상과 오가면서, 가상과 실상의 경계 자체가 흐려지기 시작한다. BIM 모델 안에 서 있는 건물은 미래의 건물인가, 현재의 건물인가. 짓기 전에 가상 안에 다 서 있다면, 그건 어느 시간의 건물인가. 짓고 난 다음에도 가상이 실상과 함께 변한다면, 그 가상은 실상의 거울인가, 실상의 한 부분인가.
이 흐려짐이 어디까지 갈지를 다 그릴 수는 없다. 다만 그 자리에서 다른 질문 하나가 떠오르기 시작한다는 것은 짚어 둘 수 있다. 가상과 실상이 구분 안 되는 시대가 오면, 그 시대를 사는 사람의 자리는 어떻게 되는가. 매체를 만들어 온 인간의 자리, 그 매체가 만든 세계 안에서 살아온 인간의 자리는 어떻게 옮겨지는가.
이 질문이 다음 글의 자리다.
여기까지 매체사의 한 굽이를 따라왔다. 형상을 자르는 매체에서 형상을 자르지 않는 매체로. 한 방향에서 왕복으로. 박제에서 동기화로.
물론 자르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어떤 매체도 다 가져오지는 못한다. 다만 자르는 자리가 옮겨졌다. 우리가 매체사 내내 가닿고 싶어 했지만 못 가닿던 형상이라는 한 차원에, 매체가 처음으로 따라왔다.
거기까지가 매체가 우리 인식에 닿기 시작한 자리다.
